본문 바로가기

Impress_감상노트/책

[독후기록#5. 상냥하게 살기_하이타니겐지로] 나를 많이 울린 책,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글

 

 

<상냥하게 살기>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 나무꾼 옮김

 


상냥하게 살기

저자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출판사
양철북 | 2015-01-0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하이타니 겐지로가 전하는 ‘상냥함’ 넘어져 본 사람만이 ‘상냥함...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나를 많이 울린 책,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글

 

 문득, 혼자 책만 덜렁 끼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주위에선 어디로 가냐, 누구랑 가냐는 물음에 '그냥 놀러. 아무데나. 혼자.' 라는 대답을 하는 나를 의아해 여기긴 하지만, 나는 가끔 혼자 데이트하는 시간이 참 좋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함께 있는 시간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겐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아무튼,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잔뜩 사둔 책들 중 아직 읽지 않은 책 한 권, 바로 이 책, <상냥하게 살기>를 들고 카페로 향했다. 하이타니 겐지로 씨의 책인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는 내가 자주 인용하고 좋아했던 책인데, 그 책을 썼던 작가가 쓴 책이라고 해 별 생각없이 충동구매한 책이다. 사실 소설일 줄 알았는데 펴고 보니 산문집이어서 놀랐다.

 

 카페에서 쇼핑을 마치고 여행 계획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옆 테이블의 여자 분 세 분의 이야기를 멍하게 듣다가 책을 펴 들었다.

 

 1부에서는 저자가 아와지 섬으로 가서 살게 된 배경과 거기서 살면서 농사를 지으며 느낀 것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저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등을 고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곳에 가 살게 되었는데, 농사를 망치기도 하고 또 화를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랄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같았다. 소탈한 느낌이 있는 시골에서 생활하는 초보 농사꾼의 모습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었다.

 

  그런 농사꾼(?)의 삶이 엿보이는 1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편은 '피꽃'이라는 편이었다. 토종닭을 구하지 못해 부화기로 애지중지 부화시켜 키운 닭 중 한 마리를 잡아먹는 장면이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은 구절 역시 이 장면과 맞닿는 구절인데.... 너무 많이 인용해 그걸 인용하진 않겠다. 아무튼,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약간 엉뚱하게도 석산꽃을 실제로 보고 싶어졌다. 아마 석산꽃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뇌리에 남아서가 아닐까. 여운이 남는 표현이다. 내 생명 속에 석산꽃이 핀다는 건....

 

닭을 잡아먹었다. 양다리를 묶어 밀감나무에 매달았다. 경동맥을 칼로 찔렀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 곳곳에 붉은 석산꽃이 피었다.

볏도 내장도 모두 먹었다.

 병아리 적에 비를 맞으며 떨고 있던 일, 전등 불빛으로 몸을 데워주던 일, 내 어깨 위에서 머리 위로 기어올라 비듬을 쪼아 먹던 일, 그런 추억을 함께 먹었다.

 내 주위에 석산꽃이 핀다. 내 생명 속에도 석산꽃이 핀다.

-p64

 

  이 바로 다음 편에서 저자는 화를 낸다. 어떻게 병아리 때부터 키운 닭을 잡아먹을 수가 있냐고, 살생을 하지 않아도 고깃집에서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다양한 비난을 듣고 화가 난 저자가 먹을거리는 모두 생명이라며 쏘아붙이는 데, 그 구절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너희는 살생 안 하고 사냐? 생명을 먹을거리로 바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을 남의 손에 맡긴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는군."

- p67

 

 도시에 살면서 먹을거리의 생산과정으로부터 떨어져 지내다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심, 자연과의 공감 그런 것들과 참 멀어지는 것 같다. 또 누군가의 고생이 깃들어 있음을 자주 망각하게 되니까. 지난 번에 일본의 그라노24K에 갔을 때 그 기업이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으로 하고 있는 게 생각이 났다. 먹거리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를 체험하게 하는 그 농촌프로그램이 내게도 필요한 게 아닌가...하고. 자급자족, 지산지소. 그런 것들의 가치를 최근 들어 자주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선순환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도 좀 더 관심을 갖고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1부의 이야기들을 다 읽어냈다.

 

 2부에서는 농촌생활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1.

 교육은 기성세대가 일상생활에서 쌓은 다양한 지혜와 행동을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젊은 세대에 전해주는 일이고, 학교교육은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잊고 있다.

 교육에서 아버지가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하다. 자식을 기르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도 성장해나간다.

 부모 자식 관계가 대등하다는 것은 함께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 자식 관계의 단절은 아버지가 본연의 의무를 게을리한 채 부모의 권위만 휘두르거나 부모의 가치관을 덧입히기 위해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경우에 발생한다.

 아이는 부모의 생활이 자신과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더없이 상냥해진다.

-p109

 

 저자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참 와닿았다. 특히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전해주는 일이라는 지점이. 점점 더 교육현장이라는 게 그런 교류를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그 속에 인간적인 교류가 얼마나 될까? 인터넷 강의에서, 아니더라도 강의실 안에서 어떤 인간적인 교류가 일어나고 있는가?

 

 내가 부모가 된다면 과연 '함께 배우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2.

공통어(나는 표준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숙명적으로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흔히 '사투리 되살리기'라는 말을 하는데, 원래 모든 말은 사투리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어가 엉망이 되는 것이다.

- p149

 

 나는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쓰는 말을 '서울말'을 한다고 하지 '표준어/표준말'을 한다고 하지는 않는데, 종종 아는 후배가 서울 친구가 하는 말을 다 '표준말'한다고 할 때면 불편한 기분이 든다. 나도 사투리 억양을 쓰긴 하지만, 표준어를 쓸 때도 많고, 서울 친구가 표준어가 아닌 서울말을 할 때도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이야기 한대로 모든 말은 사투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이전에는 잘 몰랐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 특히, 필리핀어를 살짝 배우면서 '모든 말은 사투리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필리핀에는 수많은 방언이 있고, 우리가 흔히 필리핀어라고 생각하는 따갈로그어는 그 방언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말이다.

 

#3.

고작 교사와 제자 사이에 지나치게 친한 척하는 사람이 나는 감당이 안된다. 둘 사이에 인생을 엄격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맺어진 우정이 없다면 그 인간관계는 메마른 관계라고 생각한다.

-p160

 

S라는 제자가 있었다. 5학년이 되어서도 "선생님은 왜 나를 예뻐해주세요?"라는 말을 "선생님은 외 나를 예뻐해주세요."라고밖에 쓰지 못하는 아이였다. 고군분투하던 그 아이는 그해 가을 다음과 같은 멋진 시를 썼다.

 

지금은 태풍이 한창

 

지금은 태풍이 한창

나는 태풍이 참 좋다

남자다우니까

선생님도 틀림없이 태풍을 좋아할 거다

풍속 40미터면 어때

갑자기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정전이라서

촛불을 켜고 편지를 쓴다

지금쯤 선생님 뭐 할까

 

나는 차 안에서 그 S가 자동차 판금 기술자가 되어 땀을 뻘뻘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똥 덩어리 같은 녀석! 내가 너한테 질까 보냐!"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S는 내 평생의 친구다.

-p162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민아 선생님 생각이 났다.

 

 사실, 이민아 선생님과 나는 어찌보면 특이한 관계인 것 같다. 나는 엄격히 말하면 선생님의 '제자'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나 싶은. 선생님께 공식적으로 어떤 강연에서 수업을 듣거나 한 적도 없고, 선생님이 입학사정관으로 있으면서 직접 뽑은 학생도 아니고.

단지 위에 나왔던 '인간적 교류'를 통해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학생일 뿐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S처럼 '지나치게 친한 척'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내 삶을 살아내어 '함께 배우는'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이민아 선생님의 비전과 꿈이 나와 너무 먼 꿈은 아니라서, 언젠가 살다보면 함께 할 일도 생기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음.. 전반적으로 하이타니 겐지로 씨의 느낌이 이민아 선생님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민아 선생님의 시집을 읽을 때의 기분과 지금 이 책을 읽는 나의 기분이 어딘지 닮아서일까. 그 사람의 인생이랄까, 삶의 경험들이 상상되면서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궁금하네. 선생님은 요즘 잘 지내시는가... 여전히 강연을 하시면서 본인의 꿈을 향한 구상으로 빛나고 있는지..

 

#4.

무엇보다 결손가정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 한부모 가정이 왜 결손가정인가. (중략)

 

"세상에는 부모가 헤어져서 불행한 아이만큼 부모가 헤어지지 않아서 불행한 아이도 많다."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른다. 그 차별의 굴레는 취직 때까지 이어져 열심히 살려는 아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중략)

'한부모 가정의 아이는 어둡다.'는 잘못된 이미지는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다.

-p170~171

 

이 부분에선 뭔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 이야기이고해서. 특히 '세상에는 부모가 헤어져서 불행한 아이만큼 부모가 헤어지지 않아서 불행한 아이도 많다'는 에리히 케스트너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참 많이 와닿았다. 부모가 헤어지지 않아서 불행했던 시절의 상처들이 나에게도 또 내 동생에게도 아직 남아있다. 지금도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지만, 종종 절망감이 들 때도 있고, 지나치게 자신의 미래와 우리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어린 동생이 안쓰러울 때도 있다. 아마 한동안, 오랫동안 천천히 극복해가야하는 문제겠지.

 

#5.

이런 아이들의 감수성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런 글도 있었다.

"남들한테는 이런저런 훌륭한 말을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착실한 사람이 없어요. 한마디로 대충대충이에요."(초등 6년, 여)

 이런 아이들을 되바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부모를 얕잡아 보는 아이보다 아이를 얕잡아 보는 부모가 훨씬 많다.

 아이들은 그런것까지 꿰뚫어 보고 있다.

 아이의 인생이든 어른의 인생이든 둘도 없이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대등하다. 함께 배우려는 자세는 아이보다 부모나 교사에게 더 부족하지 않을까.

-p178

 

 

초등학교 6학년의 말이라는 부분이 나를 반성하게 했다. 배우려는 자세로 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내가 뱉은 말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지.하고.

 

 

 3부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저자가 아이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이야기 한다. 교육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경험들도 더 많이 나온다. 나는 2부에서 울컥했던 감정들이 3부에선 소용돌이 침을 느꼈다. 카페 안인데 울 수도 없고... 읽으면서 울음을 참느라 읽다 말다를 반복했다. 눈에 열이 나기 시작했는데, 에어컨으로 쌀쌀한 실내공기 탓인지 그게 더 의식이 되니까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결국 아래에 인용할 부분을 읽고 났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한 번 다녀와야 했다.

 

#1.

 수업 시간에 <선생님 내 부하 해>에 실린 '껌 하나'라는 시를 다루었을 때 다음과 같은 시가 탄생했다.

 

도둑질

5학년 아라키 켄

 

선생님이 무라이 야스코의 시를 읽어주었을 때

나는 가슴이 아파 한숨만 나왔다

나는 옛날에 도둑질을 한 적이 있다

 

유치원 다닐 때 집에 찰흙이 없어서 찰흙놀이를 할 때 탐이 났다

끝나는 시간에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떼어냈다

집에 돌아와 좋아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어쩐지 점점 겁이 났다

나는 찰흙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선생님이랑 얼굴을 마주 보기 무서웠다

선생님은 훔친 걸 모르는데도

그리고 몇 년이나 지난 지금 이 시를 쓴다

물론 유치원 선생님도 모르고

엄마도 모른다

내 마음만 알고 있다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잊으려고 했지만

잊히지 않는다

 

선생님이 야스코의 시를 읽으니까

겨우 덮어지려는 것이

다시 들쑤셔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잊어버렸다면

진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를 쓸 때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선생님이랑 나뿐이다

 

"자기만 잊으면 아무도 모른 채 넘어갈 수도 있는 사소한 일을.."하고 다카시나 씨는 중얼거린다. 사람이라면 그 사소한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어린 영혼 앞에서, 다카시나 씨는 오늘날 교육이 잊어버린 것을 찾으려 한다.

 

(중략)

 

다카시나 씨는 말한다.

"어린이를 고정된 존재라고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어린이는 깊이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고 변화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그런 어린이들과 함께할 용기 있는 교사가 없다는 것이다."

-p194~195

 

공책

 

공책을 펼쳤더니

빨간 글씨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읽어봤더니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때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더럽히든 더럽히지 않든

이 공책은

선생님 공책이기도 한데!

 

 나카야마 씨와 시마타 고 사이의 유대감이 반 아이들에게 옮아간다. 남의 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용기 같은 것으로써....

- p199

 

나는

5학년 후지이 교코

 

시마타의 괴로움을

나는 절반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 고통은

시로 쓰면

말로 하면

가족 한 사람이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쓸 수 없습니다.

시마타의 일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내 괴로움은 아무도 모릅니다.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왼쪽 절반 또는 오른쪽 절반은

무거운 짐을 덜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남아 있을 겁니다.

-p200

 

 정확히 왜 눈시울이 붉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교류가 감동적이어서인지, 교코의 시가 내 마음을 울려서인지....

 

 교코의 시를 읽다보니 문득 며칠 전 집에 갔을 때,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쓴 시가 쓰인 액자가 대문 옆에 나와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교내에서 상을 받게 된지라, 어떤 화가 분이 직접 그림도 그리고 그 위에 내 시를 써 액자를 만든 뒤 학교 복도에 전시를 했던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창고에 있다가 곰팡이가 슬어 말리려고 내놓았다고 했었다. 왜 버리지 않았냐는 내 물음에 엄마는 차마 버릴 수 없었다고 했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눈시울이 벌게 졌던 것 같다. 별로 잘 쓴 시도 아니고 나에겐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시가, 어머니에겐 어떤 의미였던 걸까.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2.

 어린이가 지닌 상냥함의 근원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느끼는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런 사상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입니다. -p244

 

 어린이의 공감은 정신의 공유로 성립됩니다. 곧 생명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생명은 둘도 없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아이들은 생명에 대해 대단히 민감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랑에 대해 매우 예민합니다.

 

인간의 상냥함이 분명 생명의 근원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신체장애를 가진 한 소녀에게 배웠습니다. (중략)

 나는 이 소녀 덕분에 '어린이가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소녀가 나를 찾아온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근육이 점점 마비되고 있어서 전혀 표정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언어장애가 동반되어 무슨 말을 해도 '우우' 하는 신음소리로 들릴 뿐 전혀 알아듣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빼앗겨버린 소녀와 소통하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중략) 모든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썼는데 그때 나는 거만하게도 말의 세계가 커뮤니케이션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녀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나의 오감을 곤두세워야 했습니다. 소녀와 함께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내가 손으로 받쳐주기는 했지만, 소녀는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맞은편 가장자리까지 짧은 여행을 완주했습니다.

 그 때 소녀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름다운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습니다. 반짝이는 눈이, 물에 젖은 피부가 분명 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중략)

 '내게는 소녀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수영장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녀의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보이지 않는다, 예전의 나처럼.'

 보이지 않던 아이가 보인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세계를 발견했다는 뜻이며, 그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곧 '어린이가 보인다'라는 의미는 나 자신이 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세계가 우리의 가치관 너머에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로써 자신을 깨부술 수 있는 용기를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 p246~250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자신을 깨부술 수 있는 용기'를 나는 가지고 있는가... 하고 돌이켜보게 되었다.  자기 방어가 강한 편인 내가 꼭 간직해야 할 말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소녀의 모습이 상상 속에서 아른거렸다.

 

#3.

나만 남겨두고 가버렸어

1학년 아오야마 다카시

 

학교 갔다 오니까

아무도 없었다

새아빠도

우리 엄마도 형도

그리고 아기도

모두 집을 나가버렸다

아기 기저귀도 없고

엄마 옷도 없고

집 안에 짐이 하나도 없다

나만 남겨두고 이사를 가버렸다

나만 남겨두고

 

 이렇게 시작하는 여섯 살 어린이의 시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 아이는 점심값을 아껴 장난감을 사고 "아기가 돌아오면 이 장난감을 줄 거다. 빨리 돌아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아이의 상냥함 앞에, 나는 인간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p262

 

이 부분만 읽어서는 아마 전율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한참 앞에,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시를 쓴 아이의 사연이 짤막하게 나온다. 부모에게 버려져 조부모와 살고 있는 그 아이가 급식비로 나오는 100엔을 자기 밥 먹는데 쓰지 않고 그 돈으로 장난감을 샀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기가 돌아오길 기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부분만 보았을 때는 왜 급식비로 장난감을 사나 했는데, 뒷 부분에 이 시를 만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아름다운 인간이고자 하는 정신을 지닌 인간'이라는 이 사람들의 존재에서 용기를 얻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 외에도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 부분에서 진보적인 저자의 성향이 보였고, 여러 공감가는 부분들이 있었다.

 

 어쨋거나, 전반적으로 이 책은 나를 울리기도 하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자꾸 떠올리게 해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후아...

읽고 나서도 자꾸 마음이 울렁거려 멍-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것이 커피를 마신 탓인지 책을 읽은 탓인지 저울질 하다 둘 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많은 짦은 생각들이 자꾸만 스쳐지나갔는데, 대부분은 내게 '주말'의 의미와 또 '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핸드폰이 꺼져있고 펜을 들고 오지 않아 미처 적어두질 못했더니, 어떤 생각들이었는지는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꾸 울렁거릴 것 같아, 이렇게 써둔다. 쓰고나니, 무언가 속이 시원한 기분이다. 다음 번에 다시 읽게 되면 또 다른 생각, 또 다른 감정이 들겠지...

 

누군가 내게 책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아마 얼마간은 이 책을 추천해줄 것 같다.